<김영민> 저 | 샘터 | 2010--01
국내도서>인문학>철학 일반>교양 철학
[김영민의 공부론]은 오랫동안 학문공동체 ‘장미와 주판(1992~2009)’을 중심으로 삶(사람)의 무늬를 탐색하는 공부로서의 인문학적 실천을 수행해 온 저자(김영민)가 인문학 공부의 이치를 살핀 책이다. ‘인문학 공부의 이치[人紋]’는 무엇이며, 어디에 있는 것일까? 저자는 중국 고전 [문심조룡]에서 전설적 무사 미야모토 무사시의 [오륜서], 현대 이소룡의 궁푸(쿵후)에 이르기까지 인물의 삶이나 고전 속에서 톺아본 27가지의 참신한 공부론을 펼치며 인문학 공부의 이치를 살핀다. 하나하나 그의 글을 따라가다 보면 이 책의 부제이기도 한 ‘인이불발(引而不發)’, 즉 ‘쏘기 전에는 영영 알 수 없는 것이며 쏜 후에는 잊어버려야 하는 것’이란 공부의 이치에 절로 닿을 수 있을 것이다. 인터파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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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본 최고의 무사 미야모토 무사시가 쓴 병법서인 <<오륜서>>는 '차림새가 있는 듯이 없고 없는 듯이 있는 상태'를 유독 강조한다. 문사들이 지병행진을 말하는 것과 다를 바 없다. 형을 뚫어 내고 자기표현으로 나아간 단계로서, 이른바 검선일체에서 말지 않을 것이다. 무사시의 해설을 덧붙이면, "몸이 정지해 있을 때에도 마음은 정지하지 않아야 하며, 몸이 민첩히 행동할 때에도 마음은 평정하게 하여 몸의 움직임에 끌리지 않도록 해야한다"는 것.
2012-02-23 14:16:3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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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34page
의식과 무의식은 배타적 이분구도로 깔끔하게 해체/분리되는 것이 아니라 오히려 서로 겹치고 부딪히며 맺히는 역동적 관계 속에서 상호보완하는 관계에 놓여 있기에, 역설적으로 모른 체하기(반의식)라는 매개가 앎(의식)과 몸(무의식)을 접속시키는 지점에서야말로 앎이 지닌 최고의 가치와 가능성이 발생한다는 미립을 온축하고 있는 공부의 지침이 바로 '알면서 모른 체하기'이다. 여기에서도 문제는 역시 타자성인데, 타자성의 지평을 놓치거나 임의로 무시한 채 내 의식(의지)만을 고집하는 게 허영이듯이, 앎이 모른 체하기(반의식)라는 전래의 매개를 놓치거나 임의로 무시한 탓에 몸(무의식)의 지혜를 봉홰하고 그 앎의 표면적 자리(의식)만을 고집하는 게 문제라는 뜻이다. 이처럼 '아는 체하기'의 태도만을 고집하는 소위 지식인들은, 그네들의 앎(의식)을 남보다 한시라도 더 빨리 말로써 풀어 냄을 통해 자신들의 학문적 성취나 진보의 정도를 가늠하곤 한다. 허나 이토록 조급히 말이라는 사이비-몸을 얻어버린 앎은, 그 앎에 마땅히 온축되어 있을 시간성과 역사성으로부터 철저히 거세된 채 무늬가 아닌 얼룩이 되어 물 위의 기름마냥 몸과 괴리된 상태에서 부유할 뿐이다. 앎(의식)은 제 스스로가 몸(무의식)에 가닿아 서로 조우한 뒤에 그 몸으로부터 앎(의식)의 이치를 회통시켜야 하는 일종의 절차 혹은 단계를 거쳐야 하기에, 몸(무의식)에 대한 적절한 배려나 고려가 없이 말이라는 형태로 거침없이 다가오는 앎(의식)에 대해서라면, 몸(무의식)은 자기보호기제를 작동시켜서라도 위험한 외부자극에 다를 바 없는 앎(의식)이라는 이물스러움을 차단하게 된다. 앎(의식)이 제 스스로의 이치를 피워내는 장소는 다름 아닌 몸(무의식)이니, 앎(의식)과 몸(무의식)이 교호하몀 상호 섭동케 되도록 의식과 무의식을 연계시키기 위한 최소한의 개입이 필요하며, 이는 의식과 무의식 모두의 주체인 학인 스스로가 의식으로부터 무의식으로 가는 길을 능동적으로 열어젖혀 놓는 '모른 체하기'의 연극적인 실천을 통해 이루어질 수 있다. 아무리 치열한 인식중심의 활동을 통해 얻게 된 지식이라 할지라도, 모른 체하기라는 반의식적 과정을 거치지 않은 상태로서는 아직 날것이며, 거친 상태이기에 앎(의식)이 몸(무의식)에 착상되는 여유와 틈을 거친 뒤에야 비로소 지식의 모래밭은 사람무늬가 지닌 총체적 가능성을 꽃피워낼 수 있는 두텁고 보드라운 지혜의 토양으로 변모해 가는 것이다.
2012-02-23 14:13:5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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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31page
신뢰가 아닌 정서에 따라 움직이는 호의,호감은 '마음'만을 키우거나 움직이게 하는 동력이며 권력의지의 일종일 따름이기에, 호감, 호의(만으로)는 결코 관계를 구원하지 못하는 것이다. '좋아하는 사람'이 아닌 '돕는 사람'이 되고자 하는 동무들이 신뢰로 나아가기 위해 내딛어야 하는 첫걸음은 사이비 감정이입의 안이한 나르시시즘에 다름 아닌 호감, 호의로부터 벗어나는 일에 있다고 할 수 있다.
2012-02-23 14:02:1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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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28page
새로운 무늬를 지닌 동무들이 '글-말-생활-희망'의 중층구조를 지닌 총체적/전인적 비평 속에서 좋은 몸(버릇)을 통해 만들어가게 될 불화-공동체/산책-공동체/동무-공동체/버릇-공동체/비평-공동체는, 욕망으로 점철되었던 자아와 체계를 밑절미 삼아 이루어진 세속이라는 늪(만)이 피워낼 수 있는 한 송이 연꽃인 까닭에, 동무들에게 있어 세속은, 언제나 절망이기에 다시금 희망인 것이다.
2012-02-23 14:00:1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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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25page
다시말해, 인문학 공부는, 내 기질과 버릇을 털어 내면서 나라는 타자성인 너를 향해 끄-을-고 나아가는 실천적 근기의 표출방식인 (자서전적 태도와는 정반대인) 연극적인 태도 혹은 알면서 모른 체하기로부터 시작되는 것이다. '글-말(응대)-생활-희망'이 늪으로서 안착하기 쉬운 '글'이라는 덫을 넘어서기 위해 요청되는 수행의 단계가 다름 아닌 '말(대면관계)'이라는 점에 주목할 필요가 있는데, 자기-생각의 총체로 변질되어 버린 글의 바깥은 우선 '대화/응대'이기 때문이다. '생각의 밖으로 걸어나오려는 시도는 반드시 몸을 끄-을-고 자아와 그 완고한 생각의 성채로부터 벗어나 타자들을 향한 개입의 형식을 취하는 일종의 비용을 요구하기 마련이지만, 진지한 비용 치르기에 몸을 사리거나 쉽게 체증을 보이는 '구경꾼'들은 '생각'의 보좌에 앉아 영원히 끝나지 않을 구경을 일삼을 뿐, 자신의 생활이나 버릇을 매개로 개입하거나 개입되는 위험을 감수하려 하지 않는다.
2012-02-23 13:40:2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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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6page
생각 대신 공부하는 이.
호올로 좋아하기보다는 서로 돕는 이.
구경하는 대신 몸을 끄-을-고 개입하는 이.
영리하게 매매하기보다 현명하게 주고받는 이.
타자성이라는 심연을 동정적 혜안으로 굽어볼 줄 아는 이.
초월하지 않기 위해, 진리를 말하지 않기 위해, 조심하는 이.
글-말-생활-희망을 축으로 함꼐 사귀고 배우며 비평하는 이.
아무리 거듭 만나도 온기가 끈끈함으로 변질될 줄 모르는 이.
고백과 소문을 피하는 대신, 극진히 듣고 찰지게 대화하는 이.
겉으로 드러내지 않은 현명함이 속으로 고여 흐르는 슬금한 이.
체계와 창의적으로 불화하고자 걸으며 체계 외부적 생산성을 얻는 이.
체계가 기입시킨 상처의 우울로 체계 너머의 명랑을 빚어내는 성숙한 이.
마음/기분/심리를 알면서 모른 체하기 위해 근기 있게 약속하며 지키는 이.
독창성이라는 허영의 '얼룩'대신, 겸허한 모방이라는 인정의 '무늬'를 지닌 이.
노릇이 아닌, 생활의 무늬/삶의 태도/버릇만으로 서로를 인정하며 모방하는 이.
2012-02-23 13:33:2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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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5page
이처럼 사변의 피폐로부터 구원받을 수 있는 새로운 길을 조형해 나가기 위해 서로간의 차이(동무)가 만드는 서늘함의 긴장으로 이드거니 함꼐 '길 없는 길'을 걸으며 체계와 자아 너머로의 산책에 나선 이들이 바로 동무이며, 슬기-근기-온기가 수렴되는 지속가능한 삶의 양식을 모색해 나가기 위해 함께 어긋내며 어울리며 어리눅어(일부러 어리석은체 하다.) 가는 이들이 동무이다.
2012-02-23 13:29:2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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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page
시간의 명암과 굴곡을 거치며 얻은 탁하고 묵은 관계인 친구는 시간이 보존해온 향수이며, 그 향수를 공유하는 몸의 기억이 만든 관계다. 무엇보다, 친구는, 듣지 않는 관계이기도 한데, 그들은 끊임없이 잡담과 수다와 고백을 일삼으면서 과거의 공유된 기억을 회집하고 추억을 채색하지만, 응당 괄목상대해야 할 그 친구들의 외부성과 타자성에는 귀기울이지 않는다.
2012-02-23 13:27:0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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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83page
그러므로 공부는 그 오연한 주어들의 행진을 적절히 제어하고 "가깝고 낮은 것들(=술어들)을 싫어하지 않는 일"이다. 그것은 일찍이 니체가 지적한 대로 기성의 전문성에 미달한 아마추어가 아니라 전문가가 되어서도 "종합적인 시야를 갖고 사방을 둘러보고 내려다 볼 수 있을 만큼의 높은 수준"의 아마추어인 것이다.
2012-02-23 13:16:4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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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73page
지적 허영과 갖은 변명('있다' / '안다') 속에서 '죽어도 죽지 않는' 문사들과 달리, 이들의 부정어('없다' / '모른다')는 일촉즉발하는 삶과 죽음의 위기 앞에서 정직할 수밖에 없는 체험들이 걀잘힌 갓ㅇ;디/
이를테면 3년은 30년과 충분한 만남과 사귐과 다툼이 있었고, 상대를 간파해서 이윽고 그 속내를 속속들이 읽었다는 것이다. (문자로써는 벨 수 없는 법이니, 말은 슬프게도 칼보다 쉽게 나오는 것, 그리고 이 쉬움이 곧 허영의 첩경이다.)
2012-02-23 13:15:0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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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70page
변화는, 그러므로 공부는 심리와 초월적 타자의 사잇길 속에서 상호모방과 인정의 세속적 관계를 차근차근, 지며리 뚫어가는 일기일경의 노력과 실천 속에서 가능해진다.
그러니까 '몸이 좋은 사람'이란, 걸으면서 그 걷는 방식만으로 살면서 그 사는 방식만으로, 그리고 존재하면서 그 존재하는 방식만으로 통속적으로 유형화된 욕망과 열정의 소비/분배구조를 깨트릴 수 있는 결기와 근기를 스스로의 몸속에 기입한 사람이다. 그 사람은 움직이면 움직이는 대로 그 주변을 바꾸는 '위험한' 인물일 수밖에 없다.
2012-02-23 13:01:5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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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54page
이어 무사시는 그 전설 속의 이캬쿠를 거론하면서 하루에 400~500리씩 가는 사람의 걸음도 실은 "박자대로 움직이는 것"(오륜)이라고 해설한다. 따라서 "무슨 일이나 능숙한 사람이 하는 일은 바쁜 것처럼 보이지는 않"(오륜)으며, "그 길의 고수라고 할 수 있는 자의 동작은 빠르게 보이지 않는"(오륜) 법이다. 무사시는 이 이치를 싸울 때의 발놀림을 통해서 예증한다. "나의 병법에서는 발놀림이 싸울 때나 평상시나 다르지 않다. 평소에 길을 걷듯이 적의 박자에 따라, 몸의 상태에 맞추어 부족하지도 않고 넘치지도 않게 발동작이 흐트러지지 않도록 해야 한다.(오륜).
2012-02-23 12:57:2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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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50page
정중동과 동중정의 경지란, 무사시의 표현을 빌리면 결국 '병법의 박자'를 가리킨다. "무엇이나 박자라는 것이 있는데, 특히 병법에서는 박자가 중요하다"(오륜). 이것은 앞서 말한대로 '사물을 선용하는 것 속에 선비의 길이 있다'는 이치와 그 넓은 맥락을 같이 나눈다. 박자라는 것은 결국 타감의 상호작용 속에서 나와 나 아닌 것이 서로 겹치고 헤어지는 리듬에 다름 아니기 때문이다. "안팎을 내다보며, 경우에 따라서 안팎을 동시에 끌어다 이용할 수 있는 경지"(오륜)도 바로 이 박자 맞추기에 달려있기 때문이다. 무사시는 "사물의 발전하는 박자와 쇠퇴하는 박자", "맞는 박자와 맞지 않는 박자", "시간의 박자", "상대를 빗나가게 하는 역의 박자", "적의 박자와 적이 예상하지 못하는 박자"(오륜) 등을 대별하고, 이들을 명확히 구별하면서 실전에 임하라고 조언한다. 기실 그는 "이 책에는 어느 곳에서나 한결같이 박자에 대해서 적고 있다"(오륜)면서, 병법의 이치를 박자 속으로 몰아 적고 있다.
2012-02-23 12:54:3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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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43page
달인의 자기초극은 법식 그 자체가 숙련을 통해 몸속으로 기입되면서 해소된 상태를 가리키는데, 내가 말해 온 비평도 이론 그 자체가 삶의 자리 속에 지며리 개입,적용되는 실천의 이력 속에서 몸(글쓰기, 말,대면하기, 삶의 양식, 그리고 희망의 복합적 총체)에 녹아든 것에 다름 아니기 때문이다. 그런 식으로 어묵동정이 선이고, 꿈속에서도 시를 쓰고 물리학을 풀며, "어떤 일에도 동요되지 않는 확고한 자세를 취하기 위한 자세"(오륜)는 차림자세로서 있는 것이면서 또한 무수한 숙련과 실천 속에서 사라지고 없는 것이기도 하다.
2012-02-23 12:50:0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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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29page
'마음이 일면 만물이 따라 인다'는 식의 자유는 이른바 존재 중의 존재인 신을 초월적으로 대상화하는 유일신교적 태도와 달리, 이른바 해석학 너머의 해석학이라고 할 수 있는 것으로서 반방편주의의 한 극처를 보여 준다. 부정성의 반방편주의에 의하면, "도를 닦아 얻는 열반이 진리가 아니라 마음이 본래부터 고요한 것임을 알아야 참 열반"이다. 보다 분명한 진리를 모아 내려는 돋보기가 아니라, 자기이해와 성숙의 수준을 높이려는 거울닦기의 노력인 셈이다. 그러므로 "본바탕 천진한 마음을 지키는 것이 으뜸가는 정진"이 된다.
2012-02-23 12:47:3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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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22page
'예열이 없는 공부'는 신체와 정신, 무의식과 의식, 육감과 오감, 지혜와 지성, 그리고 의욕과 욕심의 근대적 분화화 물화를 깨고 새로운 몸(삶의 양식과 버릇)을 얻고 길러 인간의 통전적 성숙을 위해 그 몸을 경첩으로 삼아 갖은 이치들을 융통케 하는 데 있다. 학인들이라면 익숙한 경험이곘지만, 공부길의 난경 중의 하나는 바로 이 예열의 시간이 한량없이 늘어지면서 자기소진과 피폐의 형국이 길어진다는 데 있다. 그러므로 일상의 철학화, 공부의 일상화는 결국 이 예열과 가속의 낭비를 최소화하는 생활의 양식과 새로운 몸의 버릇에 터해야 한다.
'복자연으로서의 공부' 혹은 '예열이 없는 공부'는 실로 공부의 안팎이 없는 것으로, 공부하지 않을 때 오히려 공부의 속내가 드러난다. 칠종칠금하는 제갈량의 재주는 오히려 그가 죽었을 때 더욱 생생하게 증명되었던 것처럼, 자신의 몸을 이치들의 경첩으로 삼을 수 있다면 그의 공부는 이미, 참으로 자유로워진 것!
2012-02-23 12:44:5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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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13page
근기와 슬기, 눈 밝은 스승, '좋은 몸(버릇)' (나는 이를 '뭄이 좋은 사람'이라는 개념으로 거듭해서 재서술한 바 있다), 무의식을 발견술적 지지대로 활용할 수 있는 환경, 그리고 불퇴전의 경지는 모두 공부하는 우리를 저 건너편의 강안으로 인도하는 좋은 안내자이자 등불이 된다. 하지만 나는 지금껏 홀로 헤매듯이 공부를 하는 중에, 그저 내 나름의 고군분투 속에서 깨친 얼마간의 이치를 얻게 되었을 뿐이다.
좋은 선생을 찾았다고 해서 문제가 곧 해결되는 것도 아니다. 메시아주의적 전통에 익숙한 서양인들은 이치의 궁지에 몰리면 만남을 '사건'으로 특화하는 버릇에 빠지곤 하지만, 오히려 매사 만남이란 문제의 시작에 불과한 것이다.
2012-02-23 12:41:1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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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04page
20세기 최고의 석학 중 한 사람인 러셀은 <<수학의 원리>>(1910)를 쓸 당시 연구가 곤경에 빠졌을 경우에 사용했던 '무의식 비법'을 소개한 적이 있다. 기술적, 의식적인 노력만으로 그 난경을 빠져나오지 못하면, 그는 잠이 들기 전에 자신(의 무의식)에게 "내가 잠에서 깨어날 때까지 이 문제를 풀어놓아라"는 식의 명령(자기암시)을 내린다는 것이다. 황당하게 들리겠지만 러셀에 의하면 이 방법이 제법 효과가 있었다고 한다.
2012-02-23 12:18:2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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91page
옛말에도, '순서와 차례를 아는 것이 지혜에 가깝다'고 했지만, 정녕 차례를 아는 것이 공부이며, 그것을 아는 사람이 곧 선생이다. 주변을 돌아보면, 적잖은 젊은 열정(Passion)이 수난(passion)의 나락으로 빠졌던 것은 바로 이 차례를 알지 못한 탓.
2012-02-23 12:13:5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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62page
수년간의 시행착오 끝에 나는, 경상도의 글자가 전라도의 소리가 아니듯이 글(읽기)은 (글)쓰기가 아니라는 사실, 그리고 (글)쓰기는 관념 이전에 몸의 문제라는 사실을 통절하게 깨치게 되었다. 나아가서, 몸의 성격과 그 길은 결국 그 개인의 생활양식 속에서 조형될 수밖에 없는데, 어느 정도의 나이에 만학도의 경우 그간 고착된 생활양식의 코드들이 몸을 타성적으로 규제하고 있다는 사실이 글쓰기 공부에서 치명적인 결정인자로 작용하는 것이었다. 최소한 글쓰기 공부에 국한한다면, 특히 40세를 넘긴 사람은 좀처럼 스스로를 바꿀 수 없다고 단언한 어느 유명한 정신분석의의 진단에 나 역시 못마땅한 채로 고개를 끄덕이게 된 것이다.
2012-02-23 12:11:1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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56page
여기서 창자의 이름 바꾸기는 단지 또 하나의 이름을 '선택'한 것이 아니라는 점에 주목해야 한다. 창자는 자신의 존재,주체를 호주머니 속의 알밤처럼 가만히 둔 채 다른 이름만을 불러온 게 아니다. 이 사실은 그 누구도 자신의 이름을 스스로 선택할 수 없으며, 이름은 주변의 사람들이 자신을 이르는 방식이라는 그 기원의 사회성으로 거슬러 올라간다. 그러니까 이름은 이미 사회적으로 구속된 자신의 존재방식이 언어적으로 결절된 것인 셈이다.
2012-02-23 12:07:3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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52page
조계종의 종정이었던 성철스님은 "공부는 꿈속에서까지도 이루어져야 한다"고 했는데, 이 노숙한 선승의 일갈은 영감의 배태에 대한 과학의 이치를 소박하게 꿰뚫고 있다. 밤은 근실한 낮에 호의적이고, 무의식은 정성을 다하는 의식에 주목하는 법이다. 잠시 이 모든 경험을 두루뭉술하게 정리해 보자면, 영감이 잉태되는 과정은 일종의 무의식적 숙성인 셈인데, 여기서 극히 흥미롭고 중요한 지점은 이 무의식이 생산적으로 활성화하려면 반드시 의식의 성실한 시행착오가 선행해야 한다는 사실이다.
2012-02-23 12:05:3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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44page
체계가 자아의 내부에서 바로 그 자아의 자기정체성을 통해 활동하는 것은 상품의 체계든 지식의 체계든 큰 차이가 ㅇ벗다. (잘 알려져 있듯이, 부르디외P. Bourdieu는 이런 현상을 '아비투스 habitus'라는 개념으로 해명한다.) 그렇기에, 오늘날의 공부는 마음-공부와 더불어 반드시 체계-공부를 병행해야 하는 것이다. 문사 개인이 흡수하는 지식도 체계 속의 것이며, 개인의 열정과 냉소는 결국 체계적 모방의 메커니즘에서 벗어날 수 없는 법이다. 그러므로 모방의 유무는 아예 이슈가 아니다. 살아 있는 자라면, 특히 공부에 뜻을 둔 자라면, 그 누구나 모방을 피할 수 없기 때문이다. 오히려 중요한 것은 모방의 방식, 그리고 모방에 대한 태도 속에서 드러나는 공부의 모습이다.
2012-02-23 12:02:2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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40page
꼭 이런 짓-"따위를 머릿속에 그리며, 밤의 대부분을 지새우곤' 하는 짓-을 일러 '생각' 이라고 하는 것이다. 나는 그간 이런 식으로 자기 생각에 빠지는 것을 일러 '자서전적 태도'라고 불러 왔는데, 그 요체만을 지적하면 자기동일성을 심리적으로 강화하는 것에 다름이 아니다.
그러나 그런 식으로 밤을 지새우면서 '생각' 따위를 일삼지 말라는 게 또한 순자의 말씀이다. 요컨대 하루 종일 방 안에 틀어박혀 생각만 하느니 다 쓸데 없고 책 한 권이라도 제대로 읽는 게 낫다는 것이다. 말하자면 '생각하되 배우지 않으면 위험하다'는 말인데, 이 위험이란 곧 자기-생각을 '자연화' 시키는 것을 가리킨다고 보아도 좋다.
2012-02-23 11:54:1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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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4page
공부란 실로 돌이킬 수 없는 '변화'다. 이에 비하면 영리한 것은 '변화'가 아니거나 혹은 기껏 '변덕'이다. 아, 우리의 세속은 바잡거나(마음이 자꾸 끌리어 참기 어렵다) 반지빠른(말이나 행동따위가 어수룩한 맛이 없어 얄미울 정도로 민첩하고 약삭빠르다) 변덕의 세상이다! 물론 변덕은 몸이 아니라 생각이 주체일 경우에 가능한 삶의 태도인 것이다. 그러므로 공부가 변화의 비용이고 그것이 결국은 몸의 주체적 응답의 방식일 수밖에 없다면, 공부란 삶의 양식을 통한 충실성 속에 응결한 슬기와 근기일 수밖에 없다.
2012-02-23 11:49:5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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주먹이든 말이든, 칼이든 펜이든, 그것은 사태의 진실을 향해 유연하고 실제적으로 파고드는 방식에 주력해야 한다. 연암 선생도 학문과 문장을 논하면서 억지로 기이하고 새로운 것을 추구할 일이 아니라고 경계한다. 요점은, 자신의 스타일로 사실에 충실한 글을 쓰면 그것이 곳 기이하고 새롭게 된다는 것이다. 언거번거한(말이 쓸데 없이 많고 수다스럽다) 말은 외려 어눌한 것보다 못하고, 형만 요란스러운 동작은 실없기 때문이다.
2012-02-23 11:43:0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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